和解学の創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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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니치마이 미국 사무소 소장인 나가사카 마이야즈 요코(長坂マイヤーズ陽子) 씨의 에세이 「이오 섬硫黄島의 조선인 병사- 미 국립공문서관 소장자료 소개」입니다. 이오 섬 전투에 일본인만이 참가했던 것은 아니다는 점을 보여주는 귀중한 글입니다.

<요약>
*태평양 전쟁 중의 여러 섬에서 있은 전투에는 징용된 조선인 병사(원문에서는 코리안 병사라는 표현을 썼음)가 있었다는 사실에 대해서 이오 섬의 사례로부터 소개하고 있다.
*일본 병사나 이오 섬 도민의 희생만이 아니라 조선인 병사의 희생도 있었으며, 이러한 사실은 널리 알려질 필요가 있다.
*앞으로 미국 자료와 함께 일본이나 한국의 자료, 구술조사도 함께 필요할 것이다.

 

들어가며

니치마이 미국 사무소는 미 국립공문서관을 중심으로 자료조사 및 수집 · 공개 · 보존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이를 통해 일본의 관공서, 도서관이나 자료관, 연구소나 미디어에 정보를 제공하고 또 귀중한 자료를 차세대에 확실하게 넘겨주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또한 수도 워싱턴DC나 미국 각지에 있는 귀중한 해외자료들이 여러 분야 조사나 연구, 교육에 적극적으로 활용되기를 제안하고 있습니다.

전후 74년이 지나려고 합니다. 전쟁을 모르는 우리 세대는 부모나 조부모한테서 전쟁 체험을 듣고 자랐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모르는 것이 많은 채 어른이 되어버린 것이 아니겠냐고 생각합니다. 우리 연구소 스태프들이 매일 다니는 미 국립공문서관에는 지난 전쟁에 관한 자료가 방대하게 있습니다. 1939년의 제2차 세계대전 발발로부터 1941년에 일어난 4년간의 치열한 태평양 전쟁의 경과, 그리고 1945년 8월에 원폭투하를 계기로 겨우 전후를 맞이한 일본의 모습에 대해서도, 문서자료와 사진자료, 영상자료 등 여러 가지 매체의 자료가 존재하고 있습니다.

물론 이 자료들은 원래 타국을 위한 것이 아니며 어디까지나 미국의, 또 미군의 기록입니다. 그러나 이 기록자료로부터 당시 전쟁이 어떤 것이었던가, 또 각 지역의 전투 속에서 일본이 얼마나 처참한 상황에 몰려서 끝까지 싸우지 않으면 안 되었던가, 병사 한 사람 한 사람이 얼마나 가족을 생각하면서 필사적으로 임무를 다하려고 했던가도 엿볼 수 있습니다.

여기서는 이오 섬 전투 포로에 관한 자료에 초점을 두고 이오 섬에서 희생된 일본 병사 속에는 조선인 병사들도 포함되었다는 사실을 소개하고 싶습니다. 이러한 사실을 알리는 일이 일본과 한국과의 역사 인식의 화해에 작은 공헌을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오 섬 전투는 1945년 2월 19일 미군 상륙으로부터 시작했으며 미 해병대에 의한 공격이 3월 말까지, 그 후 미 육군 제147연대에 의한 소탕 작전이 적어도 6월까지 계속되었습니다. 일본군 약 22,000명에 미군 약 10만 이상의 병력이 투여되었습니다. 최종적으로는 포로가 된 약 1,000명을 제외한 일본군 병력 대부분이 치열한 전투 속에서 희생되었습니다. 미군 측도 약 7,000명의 전사자와 약 20,000명의 부상자를 내였고 이오 섬은 격전지에 하나가 되었습니다.

 

写真1 写真2
2 photos above: RG127 Records of US Marine Corps Entry A1-1051 Box133, National Archives at College Park, MD

 

아래 사진은 미 국립공문서관의 영상자료 일부입니다. 이 동영상 캡션에는 이오 섬 전투의 일반적인 광경이라는 제목이 붙어 있습니다. 영상은 미군 부상병을 덕 차(수륙 양용 차)에 태워서 배에 나르는 장면으로부터 시작되고 일본해군 건설대(設営隊) 대원으로서 일하고 있었던 조선인 병사의 포로의 모습, 미 해병대원의 묘지의 모습 등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미 공문서관에는 이오 섬에 관한 영상이 약 500개 정도 있으며 그 안에는 일본군 포로에 관한 영상도 몇 개 있습니다. 하지만 캡션 안에서 조선인 포로를 촬영한 것이 명확히 기재되고 있는 것은 현재 이 하나밖에 없으므로 이 영상은 귀중하다고 생각합니다.

 

写真3 写真4
写真5 写真6
4 photos above: “General scenes on Iwo Jima “: https://catalog.archives.gov/id/78629 , RG428 General Records of the Department of the Navy, Entry NPC, Film No. 8860, National Archives at College Park, MD

 

일본해군 건설대는 당시의 일본해군에 속해 있었던 부대이며 주로 비행장을 비롯해 기지시설의 건설을 담당한 부대였습니다. 미국에서도 마찬가진 부대가 해군에 속하고 있으며 일반적으로는 Seabee (Naval Construction Battalion)라고 불려 왔습니다.

당시에 관한 미군 전투기록 속에는 이 일본해군 건설대에 관한 기재가 있습니다. 미군 기록에 의하면 일본군 병력은 육군 제109사단을 비롯해 14,443명, 해군 병력은 7,015명으로서 총 병력 21,458명으로 파악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해군 병력 속에 제204해군 건설대가 들어있습니다. 미군은 이 해군 건설대 병력을 1,410명이라고 했습니다. 해군 건설대는 이오 섬의 각 지역에 약 200명부터 350명씩 배치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文書1 文書2 文書3
文書4

4 documents above: Headquarters 5th Amphibious Corps Landing Force Iwo Jima General Staff Section Reports G2 Report from RG127 Records of US Marine Corps Entry A1-1051 Box 78, National Archives at College Park, MD

미군이 점점 일본군을 몰아가면서 포로로 합니다. 그런 상황에 관한 사진은 많이 있습니다. 포로로 한 시점에서 미군은 모두 일본병사로서 파악하고 있던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写真7 写真8
写真9 写真10

4 photos above: RG127 Records of US Marine Corps Entry GW Box 20, National Archives at College Park, MD

그러나 포로를 수용소에 옮기고 나서는 일본인 병사와 조선인 병사를 구별했습니다. 다음 자료는 그 수용소의 겨냥도입니다. 또 이 자료와 함께 포로의 일과 정보나 일본어로 쓰인 수용소 규칙도 있었습니다. 미군은 수용소에서 포로를 학대하거나 살해하지 않는 것, 또 미국에서는 포로가 되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 안 하는 것도 명기되어 있어 흥미롭습니다.

文書5 文書6
文書7, 文書8

4 documents above: Headquarters 5th Amphibious Corps Landing Force Iwo Jima General Staff Section Reports G1 Report from RG127 Records of US Marine Corps Entry A1-1051 Box 78, National Archives at College Park, MD

이오 섬에서 조선인 군인이 실제로 어느 정도 있었던지는 확실하지 않습니다. 일본 해군 부대의 하나인 제204 해군 건설대는 미군 기록에 의하면 1,410명이었다고 이미 말했습니다만, 그 부대 안에 얼마나 조선인 병사가 있었는가 하는 명확한 정보는 없습니다. 그렇지만 심문조서 안에는 몇 가지 단서가 있습니다. 조선인 병사들에 대한 심문 자료들을 보면 건설대 총수는 약 700명으로부터 약 1,500명까지의 대답이 있었습니다. 그중 조선인 병사는 일본인 병사 800명에 대해 200명이라는 대답도 있고 그 부대의 대부분이라고 하는 것도 있었습니다. 그들의 심문을 바탕으로 미군이 일본군의 부대 정보를 정리한 자료가 있습니다.

4 documents above: “Partinent facts extracted from Original POW Preliminary Interrogation Report on March 7, 1945” from RG127 Records of US Marine Corps Entry A1-1051 Box 114, National Archives at College Park, MD

그 자료에 따르면 제204 해군 건설대의 총 인원수는 1,000명 또는 1,000명 이상이었고 그 대부분이 조선인 병사였고 부대는 6개의 소대로 편성되었습니다. 또 대부분이 1944년 7월 1일에 해군 건설대가 조직되기 전에 이미 이오 섬에 있었고 민간노동자로서 일하고 있었던 것과 제204 해군 건설대 총 1,000명 내지 1,000명이상 중 500명은 미군에 의한 함포사격이나 폭격에 의해 이미 전사한 것이 밝혀졌습니다.

조선인 병사가 1,000명 내지 1,000명 이상 있었다는 설명이 사실이면 약 22,000명의 일본군 가운데 약5%가 조선인 병사가 됩니다. 이오 섬이 전장이 되기 전에는 도민이 1,100명 이상 있었다고 합니다만, 이오 섬 전투에 대비하기 위해 16세 이상의 남성 103명은 군속으로서 이오 섬에 남아 전투에 참가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도민의 희생과 함께 조선인들의 희생도 많았다는 사실을 정확히 아는 것은 정말 중요한 것이라고 나는 생각합니다.

文書13

5th Amphibious Corps Landing Force G2 Periodic Report on 4/9/1945 from RG127 Records of US Marine Corps Entry A1-1051 Box 80, National Archives at College Park, MD

1945년 2월 19일의 미군 이오 섬 상륙으로부터 미 해병대에 의한 전투가 종료한 3월 말까지 일본군 전사자는 이미 21,541명, 포로는 216명이며, 그 내역은 일본인 병사 156명, 조선인 병사 60명이었다고 미군 전투 기록에는 쓰여 있습니다.

해병대가 이오 섬을 떠난 뒤에는 육군 제147연대가 소탕 작전을 짊어지게 되었습니다. 이 소탕 작전에서는 동굴에 틀어박혀 있던 일본군에게 바닷물을 넣고 그 위에 가솔린을 부어서 불을 붙이는 일도 저질러져 상상을 초월하는 처참한 전투가 계속되었습니다. 그러한 과정에서 일본군 포로는 1,000명을 넘었습니다. 일본군은 원래 22,000명 이상이었는데 살아남은 병사가 1,000명 이상이라고 하는 것은 이 이오 섬 전투가 얼마나 치열했는지를 나타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태평양상의 많은 섬에서의 조선인 병사에 대해 이오 섬에 관한 미군 자료로부터 소개했습니다. 조선인 병사에 관한 자료가 많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만 이러한 자료를 성실히 살펴보는 것은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많은 일본인 병사도 조선인 병사나 도민도 다 비참한 전투를 강요당해 희생되었습니다. 이오 섬만이 아니라 그 밖에 많은 섬에서도 많은 분이 희생되었습니다. 전투 하나하나의 상세한 상황이나 전모를 밝히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렇지만 미 국립공문서관에 남은 자료는 물론 일본이나 한국, 기타 나라들에 남아있을지도 모르는 자료, 이미 때가 늦을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생존자의 증언이나 그들이 남긴 여러 기록의 수집을 위해서도 노력을 하고 하나하나의 전투가 어떤 것이었던지, 일본군 병사들은 어떤 상황에 놓여 있었는지를 더 종합적으로 진지하게 배우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들은 이런 분들의 희생 위에 현재 사회에 살아 있다는 것을 자각하고, 다음 세대에도 전해나가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작업이 국가 간의 역사 인식의 공유에 연결되고, 나아가서는 공존이나 공생으로 연결되어 가는 것이 아닐까라고 생각합니다.

(주)니치마이 미국 사무소 소장
나가사카 마이야즈 요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