和解学の創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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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4・3사건의 ‘과거청산’과 ‘화해’

고성만

1.’화해’라는 지향
제주4・3사건에서 ‘화해’는, ‘사건의 진상규명’과 ‘희생자의 명예회복’으로 집약되는 ‘과거청산’ 프로그램이 궁극적으로 지향해야할 가치로 설정되어 왔다. 노무현 정권기인 2005년 제주가 ‘세계평화의 섬’으로 지정된 배경에도 ‘화해’라는 ‘과거청산’의 현재적・미래적 가치가 평가됐고, 국무총리 직속의 제주4・3위원회가 8년간의 활동을 정리하며 엮은 백서의 제호가 『화해와 상생』(2008)인 점에서도 ‘과거청산’의 궁극적인 목표가 어디에 두어져 있는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과거청산’의 법과 제도, 정부위원회의 취지와 방향성에 호응하는 형태로 민간영역이 ‘화해’의 이념과 가치를 수용・발전시켰는가에 대해서는 더 상세한 고찰이 필요하겠지만, ‘과거청산’의 수행주체가 중앙에서 지방으로 이행, 분화되는 과정에서 구체성을 띄게 된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민간인(주민) 피해자를 대변하는 제주4・3희생자유족회와 제주 경찰의 OB조직인 제주도재향경우회가 2013년에 실시한 ‘화해와 상생을 위한 공동 기자회견’이 대표적인 사례이다.

우리 모두는 다같은 피해자라는 인식 아래 서로를 이해하고 서로를 껴안는 아름다운 관계를 유지하기 위하여 지난 세월의 갈등을 뒤로하고 이제 우리는 함께 서로를 위로하며 나아갈 것을 도민에게 알리기 위하여….(밑줄은 필자가 강조한 것임)

두 단체의 ‘화해’에의 의지는 선언적 구호에 그치지 않았다. 기자회견 이후에도 각 진영의 정체성을 상징하는 제주시 충혼묘지와 제주4・3평화공원을 상호 정기적으로 참배하는가 하면 2014년 제주에서 개최된 전국 단위의 체육행사에서는 두 단체의 대표가 공동성화 봉송자로 등장하기도 했다.
일련의 퍼포먼스는 다소 애매모호하게 인식되어 왔던 ‘과거청산’의 정체성과 방향성을 명확하게 하고, ‘화해’가 추상적 담론이 아닌 구체성을 띈 지향점이라는 것을 인지시키는데 기여한 측면이 크다. 이와함께 종래의 ‘봉기/항쟁이냐, 폭동/반란이냐’로 대표되던 역사인식논쟁은 종지부를 찍어야할 구시대의 이데올로기적 갈등으로 여겨지게 됐고, ‘화해’의 가치가 다음 세대에 계승되어야할 바람직한 시대정신으로 전파되게 됐다. ‘과거청산’의 교훈과 시사점이 다방면에서 원용되면서, ‘진상규명과 명예회복’ 프로그램이 ‘화해’로 이어지는 ‘과거청산’ 실현 로드맵이 완성형으로 귀결되고 있다는 평가도 이어진다.
2018년 4월 3일 ‘제70주년 희생자 추념식’에 참석한 문재인 대통령 역시 추도사를 통해 유족회와 경우회의 ‘화해’를 다음과 같이 평가한다.

2013년에는 가장 갈등이 컸던 4・3유족회와 제주경우회가 조건 없는 화해를 선언했습니다. 제주도민들이 시작한 화해의 손길은 이제 전 국민의 것이 되어야 합니다.

‘화해’의 효용과 가치는 제주 뿐 아니라 남한사회에 내재되어 있는 갈등, 즉 ‘남남갈등’을 극복했던 성공 사례로 평가되고, 나아가 ‘남북갈등’을 해결해야할 한 축인 북한 사람들이 모방할 수 있는 모범적 선례로써도 의미가 부여된다.

이것은 한국 사회에서 남남갈등의 해결은 불가능하다는 식의 인식을 무너뜨리는 큰 의미를 가지는 사건이 되었다. 이러한 일이 있게 되기까지 66년의 세월이 흘렀으나, 결국은 성공한 것이다.…통일의 핵심적인 키는 북한의 일반 주민들이 가지고 있다. 그들의 협조는 남한사람들에 대한 신뢰를 바탕으로 이뤄질 수 있을 것이고 그러한 신뢰는 남한사람들이 남남갈등을 어떤 식으로 접근하여 해결하는가를 보면서 형성될 것이다. 그리고 남한 사람들이 남남갈등을 해결하는 모습을 모방하여 향후 있게 될 ‘통일 후의 남북갈등’을 해결하려 할 가능성이 많다. 그러기에 남남갈등에 임하는 남한 사람들의 태도와 능력이 곧 통일의 여부를 결정하게 된다고 할 수 있다.

2000년 이후 지난한 과정을 거쳐온 ‘과거청산’에의 노력과 성과, 갈등 당사자간의 ‘화해’에의 의지와 그 의미는 간단히 폄하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과연 ‘과거청산’으로 ‘남남갈등’은 종식됐고, ‘화해’는 실현되었다 할 수 있을까. 그리고 이는 ‘남북갈등’을 해결하는 처방전으로 원용될 수 있을까. 이 글은 제주4・3사건의 ‘과거청산’과 ‘화해’에 대해 긍정 일색의 평가가 압도하는 한국사회의 담론지형 속에서 좀처럼 용인되기 어려운 물음에 대한 답을 찾는 과정이기도 하다.

2.’희생자’의 창출
제주4・3사건의 ‘과거청산’에서 한국정부가 가장 역점을 두는 프로그램 가운데 하나는 ‘희생자’를 구체화시키는 것이다. ‘빨갱이/폭도’로 멸시당해온 국가폭력의 피해자가 치욕스러운 딱지를 떼어 내고 비로소 국가가 공식적으로 인정하는 ‘희생자’로 격상될 수 있게 되었다는 점에서 ‘희생자’는 ‘과거청산’의 주요한 산물이자 한국사회의 민주화, 역사의 진보를 상징하는 대명사로 인식된다. 때문에 법・제도에 근거하여 ‘희생자’를 선별하는 프로세스는 곧 ‘과거청산’의 범위와 내용을 구체화하는 것과 직결된다.
그러나 ‘누가 희생자인가’를 둘러싼 사회적 합의점을 찾는 과정은 순탄치 않았다. 4・3사건에 대한 해석과 이해를 달리하는 진영 간의 지난한 갈등과 대립을 거쳐 , 제주4・3위원회는 2002년 다음과 같이 ‘희생자 심의・결정기준’을 마련하게 된다.

우리 헌법의 기념이념인 자유민주적 기본질서 및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훼손하지 않는다는 원칙…①제주4・3사건 발발에 직접적인 책임이 있는 남로당 제주도당의 핵심간부 ②군・경의 진압에 주도적・적극적으로 대항한 무장대 수괴급 등은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에 반한 자로서, 현재 우리의 헌법체제 하에서 보호될 수 없다 할 것이므로 희생자의 대상에서 제외토록… .

이로써, 진압작전의 주역으로서 ‘8할 이상의 인명피해를 발생’시킨 ‘토벌대’ 와, 그들에게 살해당한 ‘주민’ 등 총 1만 4232명이 ‘희생자’로 공식 인정되게 됐다(2017년 12월 기준). 그러나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훼손’한 것으로 간주되는 ‘무장대’는 ‘희생자’에서 제외되게 됐다.
‘과거청산’의 구축물로서 ‘희생자’가 새롭게 등장하면서, 다종다양한 죽음의 내력을 갖는 사자(死者)들은 ‘희생자’로 일원화되는 한편, ‘희생자’와 ‘희생자에서 제외대상’이라는 서열화된 구도로 재편되어 버리게 됐다. 죽고 죽임을 둘러싼 구체적인 가해와 피해의 사실, 또 가해와 피해라는 극단적 구도로는 수렴될 수 없는 다양한 개개인의 관계성은 더욱 불명료하게 되어 버렸다.

3.화해의 (불)가능성
‘과거청산’은 4・3사건이 남긴 부정적 유산을 극복하고 ‘화해’라는 가치를 현실세계에서 구현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해오고 있다. 그러나 긴 호홉으로 접근되어야할 사건의 다면성과 복잡한 층위는 ‘청산’과 ‘화해’라는 용어가 상징하듯, 가시적인 결말 혹은 완성형을 전제로 다루어져 버리게 됐다. 작금의 ‘과거청산’과 ‘화해’ 프로세스가 보편성을 확보하기 어려운 이유에 대해 필자 나름의 소견을 크게 두 가지로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앞서 검토한 것처럼, ‘과거청산’의 법・제도나 정부위원회의 방침은 국가폭력의 수행자(경찰)와 그 피해자(주민)만을 국민국가 프레임 속에서 ‘희생자’로 재구성시킬 뿐, ‘희생자’의 반대 영역인 가해자를 특정하지 않는다. 때문에 ‘누가 가해자인가’라는 논의도 생략되어 왔다. 경찰과 주민이 모두 ‘희생자’로 재편되는 상황에서 과연 그들이 ‘화해’ 당사자로서의 역사성과 대표성을 갖는가라는 의문이 생겨나게 된다.
‘희생자’로 재구성된 그들 간에 어떠한 화해가 도모될 수 있을까. ‘희생자’ 간의 ‘화해’가 가능하다 치자. 그래서 ‘남남갈등’은 극복되었다고 하자. 그러나, ‘희생자’의 속성이 국민국가 이데올로기와 밀접하게 관련을 맺고 있는 만큼, 그것이 ‘남북갈등’을 극복하는데 어떻게 긍정적인 영향을 끼칠 수 있을까.
둘째, 유족회와 경우회가 주도했던 ‘화해’에 대해 한국사회 각계에서 긍정적인 의미가 부여되고 있는 것은 양측이 ‘갈등의 당사자’라는 전제 때문이다. 이러한 관계의 단순화, 도식화는 그들 사이의 ‘갈등’이 어떠한 역사적 맥락 속에서 형성되었는지에 대한 물음을 생략시켜 버리고 만다.
토벌대의 한 축이었던 경찰은 친족집단, 마을공동체와 같은 제주사회의 인간관계를 교란시키며, 주민들과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국가폭력을 수행했던 집단이다. 만연한 공포 속에서도 주민들은 검은 제복을 입은 경찰을 ‘검은 개’라 부르며 그들을 타자화 시켰다. 특히 제주출신 경찰은 사건이 종료된 이후에도 주민들의 일상생활과 가장 밀접하게 위치하며 국가폭력의 사실을 부인・은폐시키고, 살아남은 자들을 침묵시키는데 적지 않은 역할을 해왔다.
그렇게 4・3사건 이후 반세기가 넘은 시간동안 가해와 피해, 억압과 굴종의 비대칭적인 관계가 유지, 발전되어 오다가 양측이 비로소 ‘갈등의 당사자’라는 일견 대등한 관계로 전환되게 된 것은 ‘과거청산’이 본격화되었던 2000년 이후의 일이다. 억압받던 주민들도 서서히 침묵의 벽을 깨고 나와 공포의 기억과 경험을 증언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또, 주민 측은 ‘과거청산’ 과정에 주도적으로 참여하면서 ‘누가 희생자인가’를 둘러싼 문제, 정부 보고서의 기술을 둘러싼 문제, 기념과 추도를 둘러싼 문제 등 현안마다 조직적인 의견을 제시하면서 토벌대 측과 첨예하게 대립각을 세웠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앞서 검토한 것처럼, 주민과 경찰은 공식적인 ‘희생자’로 재구성되면서 ‘과거청산’의 수혜자로 재위치되었다.
‘과거청산’을 둘러싼 해석의 차이, 그로인한 양자 간의 마찰과 대립, 공방은 마치 평행선상에서 대치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양측은 국민국가 이데올로기의 토대 위에 구축되어 있는 ‘과거청산’ 시스템 속에서 공존하고 있다. ‘과거청산’이 ‘국민화합’ 이나 ‘대한민국의 정체성’이라는 가치와 연동되어야 한다는 점에 이견이 없고, ‘청산’ 혹은 ‘화해’를 위해서는 ‘무장대’를 배제시키는 ‘희생자’의 선별이 필수불가결하다는 점에서도 같은 입장을 취한다. 남조선 단독정부의 정통성에 대한 물음 역시 양자가 공통적으로 논외로 하는 화두이다. 양자는 국민국가 이데올로기의 유지와 강화라는 프레임 속에서 갈등하며 공존하는 관계 속에 있는 것이다.
어쩌면 이 점이 유족회와 경우회의 ‘화해’를 성사시키게된 결정적인 교집합이었을지 모른다. 2013년의 기자회견문에서 확인되는 ‘다같은 피해자라는 인식’ 역시 이러한 정치지형에서 공감대가 형성된 것일 수 있다. 그들은 그렇게 역사성을 말소한 ‘갈등 당사자’로 전환되어 버린 것이다. 때문에 보다 상세한 진실의 규명, 가해자의 참회와 사과, 피해자의 관용과 용서와 같이 ‘화해’ 이전에 선행되어야할 지극히 상식적인 프로세스는 생략되어 버리게 됐다. 주민 내부에, 혹은 경찰 내부에, 그리고 주민과 경찰 사이에 다종다양한 경험의 층위가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갈등 당사자’로 단순화, 도식화하고, 귀결 혹은 결착을 예고하는 ‘청산’, ‘화해’와 같은 말끔한 언어가 모든 상황을 정리하려 하고 있다. 제주4・3사건에서 ‘화해’는 가능한 것일까.